강화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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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정족산사고본 (朝鮮王朝實錄 鼎足山史庫本)
국보 제151-1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에서부터 조선 철종 때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편년체(編年體: 역사적 사실을 일어난 순서대로 기술하는 역사서술의 한 방식)로 기록한 책이다. 조선시대의 정치·사회·외교·경제·군사·법률·문화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으며, 역사적 진실성과 신빙성이 매우 높다. 이와 같은 가치를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아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실록 편찬은 국왕이 서거하고 다음 왕이 즉위한 후에 이루어졌다. 실록 편찬을 담당하는 임시 기관으로 실록청을 설치하고 편찬관을 임명한 다음, 사관(史官)이 작성한 사초(史草)와 시정기(時政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일성록(日省錄)』등의 정부 기록, 개인 문집 등을 이용하여 실록을 편찬하였다. 또, 국왕이라도 함부로 실록이나 사초를 볼 수 없도록 함으로써 사관들이 공정하게 역사를 기록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완성된 실록은 국가의 중요 서적을 보관하는 서고인 사고(史庫)에서 보관하였다.
1445년(세종 27) 전주사고본 실록이 처음 제작되었고, 이후 실록이 편찬될 때마다 전주사고에 1부씩 보관하였다. 조선전기에는 서울 춘추관과 충주·성주·전주사고에 각각 보관했는데,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3곳은 소실되었고 전주사고본만 남게 되었다. 전란이 끝난 후 1603년(선조 36)부터 3년에 걸쳐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태조부터 명종까지의 실록 4부를 추가 간행한 다음, 춘추관(한양), 마니산(강화), 태백산, 묘향산(뒤에 적상산으로 이전), 오대산 등 5곳의 사고에 보관하였다. 강화 마니산사고는 병자호란 중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1653년(효종 4)에도 화재로 일부 서적이 소실되었다. 이후 1678년(숙종 4)에 정족산에 새로 사고를 짓고 실록을 비롯한 마니산사고 소장 서적들을 이관하였다.
정족산사고본 실록은 1910년 일제에 의해 서울로 이관, 규장각도서로 편입되어 조선총독부의 관리를 받다가, 1928~1930년에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다시 이관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정족산사고본 실록을 관리했으며, 1990년 서울대학교 규장각이 독립 기관으로 분리되면서 규장각이 정족산사고본 실록의 소장, 관리 책임을 맡게 되었다. [ 참고 : 문화재청 국가 문화유산 포털]
현재 실록 보관장소* 춘추관실록은 1624년 이괄의 난으로 불타 없어졌다. * 오대산실록은 1910년 (순종 4년)에 일본 동경제국대학으로 옮겼으나 1923년의 관동대지진 때 대부분 불탔고 화를 면한 74책은 우리나라로 돌아와 국립고궁박물관 보관함.* 태백산실록은 부산기록정보센터 보관함.* 정족산실록은 서울대 규장각 보관함.* 적상산실록은 김일성종합대학으로 옮겼다. 정족산본, 태백산본, 오대산본, 기타 21책 합계 총2,077책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북으로 간 적상산본은 제외되었다.
정족산 사고 솟을대문 박정자 2018.10.08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에서부터 조선 철종 때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편년체(編年體: 역사적 사실을 일어난 순서대로 기술하는 역사서술의 한 방식)로 기록한 책이다. 조선시대의 정치·사회·외교·경제·군사·법률·문화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으며, 역사적 진실성과 신빙성이 매우 높다. 이와 같은 가치를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아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실록 편찬은 국왕이 서거하고 다음 왕이 즉위한 후에 이루어졌다. 실록 편찬을 담당하는 임시 기관으로 실록청을 설치하고 편찬관을 임명한 다음, 사관(史官)이 작성한 사초(史草)와 시정기(時政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일성록(日省錄)』등의 정부 기록, 개인 문집 등을 이용하여 실록을 편찬하였다. 또, 국왕이라도 함부로 실록이나 사초를 볼 수 없도록 함으로써 사관들이 공정하게 역사를 기록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완성된 실록은 국가의 중요 서적을 보관하는 서고인 사고(史庫)에서 보관하였다.
1445년(세종 27) 전주사고본 실록이 처음 제작되었고, 이후 실록이 편찬될 때마다 전주사고에 1부씩 보관하였다. 조선전기에는 서울 춘추관과 충주·성주·전주사고에 각각 보관했는데,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3곳은 소실되었고 전주사고본만 남게 되었다. 전란이 끝난 후 1603년(선조 36)부터 3년에 걸쳐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태조부터 명종까지의 실록 4부를 추가 간행한 다음, 춘추관(한양), 마니산(강화), 태백산, 묘향산(뒤에 적상산으로 이전), 오대산 등 5곳의 사고에 보관하였다. 강화 마니산사고는 병자호란 중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1653년(효종 4)에도 화재로 일부 서적이 소실되었다. 이후 1678년(숙종 4)에 정족산에 새로 사고를 짓고 실록을 비롯한 마니산사고 소장 서적들을 이관하였다.
정족산사고본 실록은 1910년 일제에 의해 서울로 이관, 규장각도서로 편입되어 조선총독부의 관리를 받다가, 1928~1930년에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다시 이관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정족산사고본 실록을 관리했으며, 1990년 서울대학교 규장각이 독립 기관으로 분리되면서 규장각이 정족산사고본 실록의 소장, 관리 책임을 맡게 되었다. [ 참고 : 문화재청 국가 문화유산 포털]
현재 실록 보관장소* 춘추관실록은 1624년 이괄의 난으로 불타 없어졌다. * 오대산실록은 1910년 (순종 4년)에 일본 동경제국대학으로 옮겼으나 1923년의 관동대지진 때 대부분 불탔고 화를 면한 74책은 우리나라로 돌아와 국립고궁박물관 보관함.* 태백산실록은 부산기록정보센터 보관함.* 정족산실록은 서울대 규장각 보관함.* 적상산실록은 김일성종합대학으로 옮겼다. 정족산본, 태백산본, 오대산본, 기타 21책 합계 총2,077책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북으로 간 적상산본은 제외되었다.
정족산 사고 솟을대문 박정자 2018.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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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사고[摩尼山史庫]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덕포리 1335번지 사고 - 조선시대 국가의 주요 역사 기록물을 보관, 관리하던 창고.
본래 강화부(江華府)내 봉선전(奉先殿) 서쪽에 있다가 1606년(선조 39)에 덕포리의 위치로 옮겨 신설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실록의 재 인쇄가 시작된 1603년~1606년까지는 강화부내 사고에 두었다. 이 후 새로 재 인쇄된 실록 4질과 유일본으로 남은 전주사고본 한 질 등 도합 5질본(五秩本)을 나눠 보관하기 위해 5사고(五史庫) 설치가 추진되면서 마니산사고도 설치되었다.
강화부내에 있던 사고를 마니산 기슭인 덕포리로 옮긴 시기는 1606년이거나 그 직후일 것으로 보인다. 마니산사고의 건물은 전후의 어려웠던 재정 상황으로 보아 새로 지었다기보다는 기존 건물을 이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마니산사고를 신축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니산의 재궁(齋宮)이 낮은 곳에 위치해 있어 옮길 곳을 찾아보도록 명했던 사실 등으로 볼 때, 덕포리 서재곡(書齋谷)에 사고로 쓰일 만한 재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내려오던 마니산사고도 1653년(효종 4) 11월 사각(史閣)의 실화 사건으로 많은 서적과 서궤를 소실하게 되었다. 이에 정족산성(鼎足山城) 내에 사고를 새로 짓고 남은 실록과 서책들을 옮겨 보관하여 그 기능이 정족산사고로 넘어가게 되었다. 지금도 마니산사고지로 추정되는 덕포리 서재곡 재궁지에는 돌담이 남아 있으며, 초석으로 보이는 돌들도 밭에 남아 있다.(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마니산 사고 현장답사를 하려면 옛 화도초교 마니산분교 자리의 “한국강화문화예술원”에서부터 시작해야한다. 강화군 화도면 덕포리 1335번지에는 사고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동네가 “서재골”이라 전해내려오고 있기에 사고가 있었음을 추측 할 뿐이었다. (2018년 5월 답사)
마니산 사고에 보관하던 실록과 서책들을 옮겨간 정족산 사고 장사각 건물
박정자 2018.10.08
본래 강화부(江華府)내 봉선전(奉先殿) 서쪽에 있다가 1606년(선조 39)에 덕포리의 위치로 옮겨 신설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실록의 재 인쇄가 시작된 1603년~1606년까지는 강화부내 사고에 두었다. 이 후 새로 재 인쇄된 실록 4질과 유일본으로 남은 전주사고본 한 질 등 도합 5질본(五秩本)을 나눠 보관하기 위해 5사고(五史庫) 설치가 추진되면서 마니산사고도 설치되었다.
강화부내에 있던 사고를 마니산 기슭인 덕포리로 옮긴 시기는 1606년이거나 그 직후일 것으로 보인다. 마니산사고의 건물은 전후의 어려웠던 재정 상황으로 보아 새로 지었다기보다는 기존 건물을 이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마니산사고를 신축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니산의 재궁(齋宮)이 낮은 곳에 위치해 있어 옮길 곳을 찾아보도록 명했던 사실 등으로 볼 때, 덕포리 서재곡(書齋谷)에 사고로 쓰일 만한 재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내려오던 마니산사고도 1653년(효종 4) 11월 사각(史閣)의 실화 사건으로 많은 서적과 서궤를 소실하게 되었다. 이에 정족산성(鼎足山城) 내에 사고를 새로 짓고 남은 실록과 서책들을 옮겨 보관하여 그 기능이 정족산사고로 넘어가게 되었다. 지금도 마니산사고지로 추정되는 덕포리 서재곡 재궁지에는 돌담이 남아 있으며, 초석으로 보이는 돌들도 밭에 남아 있다.(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마니산 사고 현장답사를 하려면 옛 화도초교 마니산분교 자리의 “한국강화문화예술원”에서부터 시작해야한다. 강화군 화도면 덕포리 1335번지에는 사고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동네가 “서재골”이라 전해내려오고 있기에 사고가 있었음을 추측 할 뿐이었다. (2018년 5월 답사)
마니산 사고에 보관하던 실록과 서책들을 옮겨간 정족산 사고 장사각 건물
박정자 2018.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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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가릉
지정번호 : 사적 제370호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 산12-2 1. 문화재청 자료 고려 원종(재위 1259∼1274)의 왕비 순경태후의 무덤이다. 순경태후는 장익공 김약선의 딸로서 고종 22년(1235) 원종이 태자가 되자 태자비인 경목현비가 되었으며, 다음해에 충렬왕을 낳았다. 지금의 자리에는 고종 31년(1244)경 사망한 뒤 모신 것으로 짐작한다. 고려 원종 3년(1262) 정순왕후로 추대되고 충렬왕이 즉위(1274)하여 순경태후로 높여졌다.
2004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 조사 사업을 시행한 이후, 현재의 모습으로 재정비되었다. 사적으로 지정될 당시의 문화재명은 嘉陵(1992년 3월 10일 지정)이었는데, 2011년 7월 28일 고시에 따라 江華 嘉陵으로 변경되었다.
2.강화군 홈페이지 문화재/역사 가릉은 강화에 있는 왕릉과는 달리 지상식 석실 구조를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석실의 전면에는 유리벽을 설치하여 내부를 볼 수 있도록 되어있다. 일반적으로 봉분 뒤에는 반달 모양으로 두둑하게 토성(土城)을 둘러쌓거나 돌담을 쌓은 곡장이 있으나 가릉에는 사성(莎城), 곡장(曲墻)이 없이 약간 경사진 평지에 봉분을 쌓아 올린 형태이다. 묘역은 3단의 장대석단을 설치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왕릉의 형태를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봉분이 붕괴되고 석조물은 파괴된 채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4년 보수하였고, 2004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한 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봉분 주변에는 현재 한 쌍의 석수가 있고 봉분 앞에는 석인상 한 쌍이 남아 있을 뿐 석물들이 파괴 또는 유실되어 당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참고문헌] 국립문화재연구소, 『江華 高麗王陵-嘉陵·坤陵·陵內里石室墳』3. 新編 江華史 增便 中篇 가릉의 남서쪽은 원래 바다와 접하는 가릉포(嘉陵浦)가 위치해 있어 진강산에서 마니산을 바라보는 강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가릉포는 마니산과 진강산 사이에서 오늘날 가릉 방면에 있었고, 20여척의 큰 제방을 가릉포제라 하였다. 따라서 가릉은 진강산 남방에서 남서로 이어 나오는 완경사의 동쪽에 위치해 있다. 당시 가릉의 정면은 남으로부터 동으로 15도 치우쳐 있으며, 간단히 돌을 늘어놓아 능역을 만들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능의 높이는 5척 5촌, 지름은 19척 5촌으로 능의 봉분 위치는 심하게 옮겨졌고, 석난간은 석주 6개, 동자석주 6개의 12각형으로 구성된 것으로 보이는 남은 석재가 있었다. 석수 2구는 능의 봉토 후방에 매몰 되어 겨우 두부를 노출하고 있었는데, 안면이 방형에 가깝고 심하게 우러러보는 형이었다.
이 능은 1906년경에 도굴되었다고 하며, 전하는 말에 의하면 능에는 사방을 석축 한 광(壙)이 있고, 광 벽에 연하여 석조의 울타리[柵]가 있었으며, 유물을 늘어놓고 중앙에 석곽을 안치했다고 하는데 확인되지는 않았다 박정자 2018.09.10
2004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 조사 사업을 시행한 이후, 현재의 모습으로 재정비되었다. 사적으로 지정될 당시의 문화재명은 嘉陵(1992년 3월 10일 지정)이었는데, 2011년 7월 28일 고시에 따라 江華 嘉陵으로 변경되었다.
2.강화군 홈페이지 문화재/역사 가릉은 강화에 있는 왕릉과는 달리 지상식 석실 구조를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석실의 전면에는 유리벽을 설치하여 내부를 볼 수 있도록 되어있다. 일반적으로 봉분 뒤에는 반달 모양으로 두둑하게 토성(土城)을 둘러쌓거나 돌담을 쌓은 곡장이 있으나 가릉에는 사성(莎城), 곡장(曲墻)이 없이 약간 경사진 평지에 봉분을 쌓아 올린 형태이다. 묘역은 3단의 장대석단을 설치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왕릉의 형태를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봉분이 붕괴되고 석조물은 파괴된 채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4년 보수하였고, 2004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한 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봉분 주변에는 현재 한 쌍의 석수가 있고 봉분 앞에는 석인상 한 쌍이 남아 있을 뿐 석물들이 파괴 또는 유실되어 당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참고문헌] 국립문화재연구소, 『江華 高麗王陵-嘉陵·坤陵·陵內里石室墳』3. 新編 江華史 增便 中篇 가릉의 남서쪽은 원래 바다와 접하는 가릉포(嘉陵浦)가 위치해 있어 진강산에서 마니산을 바라보는 강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가릉포는 마니산과 진강산 사이에서 오늘날 가릉 방면에 있었고, 20여척의 큰 제방을 가릉포제라 하였다. 따라서 가릉은 진강산 남방에서 남서로 이어 나오는 완경사의 동쪽에 위치해 있다. 당시 가릉의 정면은 남으로부터 동으로 15도 치우쳐 있으며, 간단히 돌을 늘어놓아 능역을 만들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능의 높이는 5척 5촌, 지름은 19척 5촌으로 능의 봉분 위치는 심하게 옮겨졌고, 석난간은 석주 6개, 동자석주 6개의 12각형으로 구성된 것으로 보이는 남은 석재가 있었다. 석수 2구는 능의 봉토 후방에 매몰 되어 겨우 두부를 노출하고 있었는데, 안면이 방형에 가깝고 심하게 우러러보는 형이었다.
이 능은 1906년경에 도굴되었다고 하며, 전하는 말에 의하면 능에는 사방을 석축 한 광(壙)이 있고, 광 벽에 연하여 석조의 울타리[柵]가 있었으며, 유물을 늘어놓고 중앙에 석곽을 안치했다고 하는데 확인되지는 않았다 박정자 2018.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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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기념물 강화 참성단(塹城壇) 소사나무
천연기념물 제502호 2009년 9월 지정분류 : 자연유산/천연기념물/생물과학기념물/대표성 이 나무는 전형적인 관목 모습에 나무갓이 단정하고 균형 잡혀 있으며 참성단의 돌단 위에 단독으로 서 있기 때문에 한층 돋보이는데, 규모와 아름다움에서 우리나라 소사나무를 대표한다. 소사나무는 잎이 작고 줄기가 고목의 모습을 가져 예부터 분재 소재로 사랑을 받아온 대표적인 전통나무이다. [참고 : 문화재청 국가 문화유산포털]
이 나무는 높이 4.8m, 뿌리부근둘레 2.74m, 수령 150년으로 추정되어진다. 전형적인 관목 모습에 나무갓이 단정하고 균형 잡혀 있으며 참성단의 돌단위에 단독으로 서 있어 한층 돋보이며 규모와 아름다움에서 우리나라 소사나무를 대표한다. 소사나무는 잎이 작고 줄기가 고목의 모습을 가져 옛부터 분재 소재로 사랑을 받아온 대표적이 전통나무이나 문화재 지정 사례로는 최초이다. 수관 폭은 동서 방향이 7.2m, 남북 방향이 5.7m이다. 나무는 전형적인 관목 모습에 나무갓이 단정하고 균형이 잡혀 있다. 나무의 줄기는 지면에서 여러 개로 갈라졌다. 줄기 수는 현재보다 많았었으나 일부가 잘려나가고 현재는 여덟 개만 남아 있다.
소사나무는 우리나라 중부 이남의 해안이나 섬 지방에서 주로 자라는 낙엽 소교목으로서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나무이다. 옛날부터 조경용수로 널리 심어왔고 특히 분재의 소재로 인기가 높다. 이렇게 대표적인 우리의 전통 나무이면서도 크고 오래된 나무가 흔하지 않은 실정이지만 강화 참성단 소사나무는 규모나 모양새의 아름다움에 있어서도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려울 정도이다. [ 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박정자 2018.08.26
이 나무는 높이 4.8m, 뿌리부근둘레 2.74m, 수령 150년으로 추정되어진다. 전형적인 관목 모습에 나무갓이 단정하고 균형 잡혀 있으며 참성단의 돌단위에 단독으로 서 있어 한층 돋보이며 규모와 아름다움에서 우리나라 소사나무를 대표한다. 소사나무는 잎이 작고 줄기가 고목의 모습을 가져 옛부터 분재 소재로 사랑을 받아온 대표적이 전통나무이나 문화재 지정 사례로는 최초이다. 수관 폭은 동서 방향이 7.2m, 남북 방향이 5.7m이다. 나무는 전형적인 관목 모습에 나무갓이 단정하고 균형이 잡혀 있다. 나무의 줄기는 지면에서 여러 개로 갈라졌다. 줄기 수는 현재보다 많았었으나 일부가 잘려나가고 현재는 여덟 개만 남아 있다.
소사나무는 우리나라 중부 이남의 해안이나 섬 지방에서 주로 자라는 낙엽 소교목으로서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나무이다. 옛날부터 조경용수로 널리 심어왔고 특히 분재의 소재로 인기가 높다. 이렇게 대표적인 우리의 전통 나무이면서도 크고 오래된 나무가 흔하지 않은 실정이지만 강화 참성단 소사나무는 규모나 모양새의 아름다움에 있어서도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려울 정도이다. [ 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박정자 2018.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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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의 관방 및 교통유적
강화의 관방 및 교통유적은 다른 시·군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매우 많다. 관방유적은 97개소 교통유적은 62개소에 이른다. 육군박물관은 1999년 강화 전 해안을 순환하기 위한 해안순환도로 건설을 위한 사전 작업으로서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것은 강화의 특수한 여건상 국방과 관광의 조화를 성취할 수 있는 최대공약수를 고려해야 하는 부담을 갖고 있기도 하였다.
1. 강화 소재 관방유적 육군박물관은 1999년 해안선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는 5진 7보 54돈대 8포대에 대한 조사를 완료하였으며, 2000년에는 12성 9봉수 3요망대 1진에 대한 조사를 마무리하였다. 다음기회에 자세히 기록하기로 한다.
2. 강화 소재 교통유적 ① 나루(津) 강가나 냇가 또는 좁은 바닷목의 배가 건너다니는 곳을 말한다. 나루라는 말은 배로 사람이나 짐을 실어나르는 곳에서 나왔다 한다. 한자로 표현하면 도(渡), 진(津) 포(浦), 항(港)이라 하였다. 강화의 나루는 21개인데 갑곶, 광성, 덕진, 초지내, 선두포, 정포, 인화, 월곶, 서도나루 등이 속한다. 참고로 월곶진(月串鎭)은 관방유적으로 군사시설이고 월곶진(月串津)은 교통유적으로 월곶나루를 뜻한다.
② 제언(堤堰) 간척은 인위적으로 환경을 개척하는 것 즉 새로운 환경을 창조하는 활동이라 할 수 있다. 간척은 국민의 노력, 재력, 지식과 기술 등이 결합되어 이루어지는 평화적인 영토 확장의 방법이라는 데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강화지역은 매우 복잡하게 해안선이 발달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이른 시기에 가장 체계적으로 대규모의 간척사업이 진행되었다. 고려시대부터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8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제언을 축조하여 간척사업을 진행하는 것은 경제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강화는 인위적인 노력에 의해 지도의 형태를 완전히 뒤바꾼 대표적인 지역 중의 하나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참고 - “강화도의 국방유적” 2000년 강화군, 육군박물관 펴냄
1696년(숙종22) 당시 강화 제언 현황은 갑곶, 용진, 화도(花島), 대청포 등 14개소였다. 그러나 1930년을 기준으로 하면 강화의 제언 현황은 41개소에 이르게 되었다. 그중 가장 넓은 평야를 만든 2개소를 소개한다.
● 선두포언 - 선두포언은 마니산과 길상산 사이의 해안에 위치한 제언이다. 1706년(숙종32)에 강화유수 민진원이 쌓았다 하여 선두포 뚝이라 칭한다. 선두포언을 쌓기 전까지 강화 남단의 선두포와 서남쪽의 가릉포 사이에는 조수가 통하였다. 즉 강화와 마니산 사이에는 좁고 긴 수로가 놓여 있어 초지포구의 선박은 화도면 동막 연안으로 우회하지 않고 이 수로를 통하여 외포리나 석모도로 갈 수 있었다.
선두포뚝을 만드는 과정을 “선두포축언시말비”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선두포 석비군에 세워져 있었으나 최근 강화역사박물관으로 옮겨졌다.
● 망월언 - 한국간척사의 상징이기도한 하점면 망월 벌판을 만든 망월언은 “만리장성 뚝”으로도 통한다. 그러나 17세기 말부터 강화지역에서도 지반침하와 관련된 재해가 자주 발생하였는데 태풍이 내습하거나 해일이 일어나면 바닷물이 방조제를 넘게 된다. 1696년(숙종22) 강화지역 여러 곳의 제언이 무너지고 농경지가 침수되었었고 계속하여 1898년(고종35) 조선후기에는 더욱 발생빈도가 잦아지고 규모도 커졌다.
특히 1998년 침수면적이 강화군 간척평야 면적과 거의 비슷한 130㎢에 달하였다. 이 재해의 복구공사 때 망월평의 “만리장성둑”이 사라진것은 애석한 일이다. 이렇게 방조제 밖의 갯벌이 대규모로 유실되면 방조제의 붕괴와 농경지 포락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망월언에는 수십 기의 그로인을 설치하였다. “그로인” 은 방조제로부터 수직으로 바다쪽을 향하여 축조된 석축인데 조수의 힘을 약화시켜 갯벌의 침식을 방지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멀리 선두포 제언이 보인다. 참고 - "신편 강화사 중편 " 박정자 2018.08.19
1. 강화 소재 관방유적 육군박물관은 1999년 해안선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는 5진 7보 54돈대 8포대에 대한 조사를 완료하였으며, 2000년에는 12성 9봉수 3요망대 1진에 대한 조사를 마무리하였다. 다음기회에 자세히 기록하기로 한다.
2. 강화 소재 교통유적 ① 나루(津) 강가나 냇가 또는 좁은 바닷목의 배가 건너다니는 곳을 말한다. 나루라는 말은 배로 사람이나 짐을 실어나르는 곳에서 나왔다 한다. 한자로 표현하면 도(渡), 진(津) 포(浦), 항(港)이라 하였다. 강화의 나루는 21개인데 갑곶, 광성, 덕진, 초지내, 선두포, 정포, 인화, 월곶, 서도나루 등이 속한다. 참고로 월곶진(月串鎭)은 관방유적으로 군사시설이고 월곶진(月串津)은 교통유적으로 월곶나루를 뜻한다.
② 제언(堤堰) 간척은 인위적으로 환경을 개척하는 것 즉 새로운 환경을 창조하는 활동이라 할 수 있다. 간척은 국민의 노력, 재력, 지식과 기술 등이 결합되어 이루어지는 평화적인 영토 확장의 방법이라는 데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강화지역은 매우 복잡하게 해안선이 발달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이른 시기에 가장 체계적으로 대규모의 간척사업이 진행되었다. 고려시대부터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8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제언을 축조하여 간척사업을 진행하는 것은 경제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강화는 인위적인 노력에 의해 지도의 형태를 완전히 뒤바꾼 대표적인 지역 중의 하나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참고 - “강화도의 국방유적” 2000년 강화군, 육군박물관 펴냄
1696년(숙종22) 당시 강화 제언 현황은 갑곶, 용진, 화도(花島), 대청포 등 14개소였다. 그러나 1930년을 기준으로 하면 강화의 제언 현황은 41개소에 이르게 되었다. 그중 가장 넓은 평야를 만든 2개소를 소개한다.
● 선두포언 - 선두포언은 마니산과 길상산 사이의 해안에 위치한 제언이다. 1706년(숙종32)에 강화유수 민진원이 쌓았다 하여 선두포 뚝이라 칭한다. 선두포언을 쌓기 전까지 강화 남단의 선두포와 서남쪽의 가릉포 사이에는 조수가 통하였다. 즉 강화와 마니산 사이에는 좁고 긴 수로가 놓여 있어 초지포구의 선박은 화도면 동막 연안으로 우회하지 않고 이 수로를 통하여 외포리나 석모도로 갈 수 있었다.
선두포뚝을 만드는 과정을 “선두포축언시말비”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선두포 석비군에 세워져 있었으나 최근 강화역사박물관으로 옮겨졌다.
● 망월언 - 한국간척사의 상징이기도한 하점면 망월 벌판을 만든 망월언은 “만리장성 뚝”으로도 통한다. 그러나 17세기 말부터 강화지역에서도 지반침하와 관련된 재해가 자주 발생하였는데 태풍이 내습하거나 해일이 일어나면 바닷물이 방조제를 넘게 된다. 1696년(숙종22) 강화지역 여러 곳의 제언이 무너지고 농경지가 침수되었었고 계속하여 1898년(고종35) 조선후기에는 더욱 발생빈도가 잦아지고 규모도 커졌다.
특히 1998년 침수면적이 강화군 간척평야 면적과 거의 비슷한 130㎢에 달하였다. 이 재해의 복구공사 때 망월평의 “만리장성둑”이 사라진것은 애석한 일이다. 이렇게 방조제 밖의 갯벌이 대규모로 유실되면 방조제의 붕괴와 농경지 포락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망월언에는 수십 기의 그로인을 설치하였다. “그로인” 은 방조제로부터 수직으로 바다쪽을 향하여 축조된 석축인데 조수의 힘을 약화시켜 갯벌의 침식을 방지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멀리 선두포 제언이 보인다. 참고 - "신편 강화사 중편 " 박정자 2018.08.19
8
강화 석수문(유형문화재 제30호)
강화 석수문은 강화읍을 통과하여 성밖으로 나갈때 지나가는 서문 좌측에 있다.
강화읍의 중심부를 흐르는 동락천(東洛川) 위에 설치한 강화산성의 수문 두 개 가운데 하나 상수문(上水門)이다. 이 수문은 강화산성의 내성에 연결되어 강화읍을 통하여 흐르는 동락천을 가로지르는 수문으로서 조선 숙종37년에 축조되었다. 3개의 무지개 모양을 한 홍예문으로 재질은 화강암이며 길이 18.2m에, 높이 2.7m 폭 4.7m이고 홍예의 높이는 1.7m,, 폭은 3m이다. 1910년까지 갑곶리 동락천 입구의 다리로 사용하다가 1972년 하수문(下水門) 자리로 옮겼던 것을 1993년 동락천 복개공사로 원래의 상수문 자리로 다시 옮겨 복원하였다. 강화산성 서문 첨화루(瞻華樓)가 길 건너 있으며 하수문은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의 강화내성은 동서남북문과 4개의 암문, 2개의 수문·남장대·북장대가 있었다. 현재 서문[瞻華樓]·남문[晏波樓]·북문[鎭松樓]은 복원되어 있고, 나중에 동문[望漢樓]은 강화군청에서 부지를 구입하여 복원 하였다. 4개의 암문 중에 현존하고 있는 것은 소남문뿐이다. 수문은 상수문만이 복원되어 강화석수문으로 불리고 있다
지금 강화읍 중심을 흐르는 동락천은 4차선으로 복개되어 48국도가 통과하며 계속 동쪽으로 흐르는 동락천은 강화 하수종말처리장으로 들어간다. 강화지역은 관개용수원으로 삼을 만한 큰 하천이 없었다. 다만 소하천을 이용한 몇몇곳이 있는데 동락천을 용수원으로 하는 조산평이 그중 하나이다. 조산평을 지금은 고시기 벌판으로 부르는데 강화대교를 넘어 강화읍으로 들어올때 왼쪽 벌판이다. "고시기"는 고씨 집성촌이어서 붙였다고 전한다.
박정자 2018.08.15
강화읍의 중심부를 흐르는 동락천(東洛川) 위에 설치한 강화산성의 수문 두 개 가운데 하나 상수문(上水門)이다. 이 수문은 강화산성의 내성에 연결되어 강화읍을 통하여 흐르는 동락천을 가로지르는 수문으로서 조선 숙종37년에 축조되었다. 3개의 무지개 모양을 한 홍예문으로 재질은 화강암이며 길이 18.2m에, 높이 2.7m 폭 4.7m이고 홍예의 높이는 1.7m,, 폭은 3m이다. 1910년까지 갑곶리 동락천 입구의 다리로 사용하다가 1972년 하수문(下水門) 자리로 옮겼던 것을 1993년 동락천 복개공사로 원래의 상수문 자리로 다시 옮겨 복원하였다. 강화산성 서문 첨화루(瞻華樓)가 길 건너 있으며 하수문은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의 강화내성은 동서남북문과 4개의 암문, 2개의 수문·남장대·북장대가 있었다. 현재 서문[瞻華樓]·남문[晏波樓]·북문[鎭松樓]은 복원되어 있고, 나중에 동문[望漢樓]은 강화군청에서 부지를 구입하여 복원 하였다. 4개의 암문 중에 현존하고 있는 것은 소남문뿐이다. 수문은 상수문만이 복원되어 강화석수문으로 불리고 있다
지금 강화읍 중심을 흐르는 동락천은 4차선으로 복개되어 48국도가 통과하며 계속 동쪽으로 흐르는 동락천은 강화 하수종말처리장으로 들어간다. 강화지역은 관개용수원으로 삼을 만한 큰 하천이 없었다. 다만 소하천을 이용한 몇몇곳이 있는데 동락천을 용수원으로 하는 조산평이 그중 하나이다. 조산평을 지금은 고시기 벌판으로 부르는데 강화대교를 넘어 강화읍으로 들어올때 왼쪽 벌판이다. "고시기"는 고씨 집성촌이어서 붙였다고 전한다.
박정자 2018.08.15
7
동막해수욕장과 갯벌
지금의 동막해수욕장은 신석기 시대 유물 조개더미가 나온 곳으로 그때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가된다. 주거지 유적으로 추정되는 이곳에서 발견된 토기 표면에는 가로 어골문이 있고, 민무늬토기편도 수습되었다. 그리고 민무늬·토기의 사용하던 시기의 폭이 매우 넓어 오랫동안 거주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곳은 60~70년 전만해도 가무락 조개를 비롯한 망둥어 등 썰물 때는 마음대로 잡을수 있었다고 한다.
동막리 유적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는 사기리 유적은 1914년의 조사에 의한 것으로 돌도끼와 빗살무늬토기를 통해 처음 알려 졌다. 옛부터 이 마을에 도요지가 있어 분청사기의 산지라 하여 사기동이라 하였다.
지금의 동막 해변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편의시설이 주위에 있어 꼭 갯벌에 들어가지 않는다 해도 멋진 자연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동막해변은 인천시 옹진군과 강화군 사이의 3000만평의 넓은 바다가 밀물 썰물을 반복하며 모래를 옮겨 쌓아 놓온 백사장이다. 이렇게 쌓인 모래를 이곳에 사시던 예전 어르신 들은 집짓는 재로로 사용했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모래는 변함없이 쌓여있다.
동막 갯벌은 모래 갯벌인데 바닥이 주로 모래질로 형성되어 있어 조개를 잡으며 즐기기 좋은 곳이다. 이곳의 생물은 바닥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는 바지락, 동죽, 갯고둥 등이 서식한다. 그리고 밀물 때가 되어 바닷물이 들어올 때는 바다에서 육지로 순차적으로 차례차례 들어오기 때문에 돌아서서 뛰어 나오면 된다. 모래펄은 갯고랑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화도 주변 대부분은 펄 함량이 90% 이상인 펄갯벌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에서는 개펄의 깊이가 수미터나 되는 곳도 있다. 펄갯벌은 함수량도 높아 보통 허벅지까지 빠지기 때문에 갯지렁이류가 더 많이 산다. 따라서 강화도 주변갯벌에는 들어가지 말아야 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특히 밀물 때는 절대로 들어가서는 않된다. 바닷물은 갯고랑을 타고 수평을 맞추어 들어오기 때문에 밀물 시간이 되면 속히 육지로 올라와야 한다. 때를 놓쳐 바닷물이 발밑까지 오면 계속 발이 빠지고 갯고랑은 이미 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뛰어 넘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스스로 육지로 올라올 수 있는 방법이 없고 즉시 구조할 수 있는 길도 없다. 구조는 바닷물이 다 찬 후 배를 띄워 접근 할 수밖에 없다. 갯벌을 잘 아는 이들은 썰물 때 배를 타고 나가 갯고랑에 세워두고 작업을 하다가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곧 배에 올라 물이 차오르기를 기다려 돌아온다고 한다. 강화의 갯벌은 펄갯벌이 대부분이므로 체험을 할 수 있는 모래갯벌은 그리 많지 않다.
두 종류의 갯벌을 비교 관찰할 수 있는 곳이 분오리 돈대를 중심으로 좌 우에 펄쳐져 있는 갯벌이다. 2018. 8. 1. 오후 3시 30분경 밀물이 시작된지 1시간 지난 시점에 분오리 돈대에 올라 두 갯벌을 비교해 보았다.
분오리돈대를 중심으로 왼쪽 분오항의 갯벌과 오른쪽 동막해수욕장 갯벌은 많은 차이가 있었다. 왼쪽 분오항 쪽은 깊은 갯고랑에 바닷물이 이미 차오르고 있었다. 먼 바다는 잘보이지 않는 상태지만 포구 가까이 있는 갯고랑은 물이 차오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바닷물이 들어오는 것을 멀리서 보는 우리는 잘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동막해수욕장은 갯고랑이 거의 없는 모래펄이기 때문에 먼 바다서부터 수평을 유지하며 차례대로 밀물이 밀려오기 때문에 부지런히 걸어서 나올수 있다. 그러나 밀물은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들어오기 때문에 쉬지 말고 속히 나와야 한다. 다행하게도 강화군에서는 50m 전방에 그물을 치고 더이상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 장난으로라도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
박정자 2018.08.14
동막리 유적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는 사기리 유적은 1914년의 조사에 의한 것으로 돌도끼와 빗살무늬토기를 통해 처음 알려 졌다. 옛부터 이 마을에 도요지가 있어 분청사기의 산지라 하여 사기동이라 하였다.
지금의 동막 해변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편의시설이 주위에 있어 꼭 갯벌에 들어가지 않는다 해도 멋진 자연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동막해변은 인천시 옹진군과 강화군 사이의 3000만평의 넓은 바다가 밀물 썰물을 반복하며 모래를 옮겨 쌓아 놓온 백사장이다. 이렇게 쌓인 모래를 이곳에 사시던 예전 어르신 들은 집짓는 재로로 사용했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모래는 변함없이 쌓여있다.
동막 갯벌은 모래 갯벌인데 바닥이 주로 모래질로 형성되어 있어 조개를 잡으며 즐기기 좋은 곳이다. 이곳의 생물은 바닥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는 바지락, 동죽, 갯고둥 등이 서식한다. 그리고 밀물 때가 되어 바닷물이 들어올 때는 바다에서 육지로 순차적으로 차례차례 들어오기 때문에 돌아서서 뛰어 나오면 된다. 모래펄은 갯고랑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화도 주변 대부분은 펄 함량이 90% 이상인 펄갯벌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에서는 개펄의 깊이가 수미터나 되는 곳도 있다. 펄갯벌은 함수량도 높아 보통 허벅지까지 빠지기 때문에 갯지렁이류가 더 많이 산다. 따라서 강화도 주변갯벌에는 들어가지 말아야 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특히 밀물 때는 절대로 들어가서는 않된다. 바닷물은 갯고랑을 타고 수평을 맞추어 들어오기 때문에 밀물 시간이 되면 속히 육지로 올라와야 한다. 때를 놓쳐 바닷물이 발밑까지 오면 계속 발이 빠지고 갯고랑은 이미 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뛰어 넘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스스로 육지로 올라올 수 있는 방법이 없고 즉시 구조할 수 있는 길도 없다. 구조는 바닷물이 다 찬 후 배를 띄워 접근 할 수밖에 없다. 갯벌을 잘 아는 이들은 썰물 때 배를 타고 나가 갯고랑에 세워두고 작업을 하다가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곧 배에 올라 물이 차오르기를 기다려 돌아온다고 한다. 강화의 갯벌은 펄갯벌이 대부분이므로 체험을 할 수 있는 모래갯벌은 그리 많지 않다.
두 종류의 갯벌을 비교 관찰할 수 있는 곳이 분오리 돈대를 중심으로 좌 우에 펄쳐져 있는 갯벌이다. 2018. 8. 1. 오후 3시 30분경 밀물이 시작된지 1시간 지난 시점에 분오리 돈대에 올라 두 갯벌을 비교해 보았다.
분오리돈대를 중심으로 왼쪽 분오항의 갯벌과 오른쪽 동막해수욕장 갯벌은 많은 차이가 있었다. 왼쪽 분오항 쪽은 깊은 갯고랑에 바닷물이 이미 차오르고 있었다. 먼 바다는 잘보이지 않는 상태지만 포구 가까이 있는 갯고랑은 물이 차오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바닷물이 들어오는 것을 멀리서 보는 우리는 잘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동막해수욕장은 갯고랑이 거의 없는 모래펄이기 때문에 먼 바다서부터 수평을 유지하며 차례대로 밀물이 밀려오기 때문에 부지런히 걸어서 나올수 있다. 그러나 밀물은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들어오기 때문에 쉬지 말고 속히 나와야 한다. 다행하게도 강화군에서는 50m 전방에 그물을 치고 더이상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 장난으로라도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
박정자 2018.08.14
6
강화 덕진진(사적 제226호), 남장포대 그리고 석호(潟湖)
덕진진은 조선시대 강화해협을 지키는 요충지로 첨사가 있어 수영에 예속하였으나 1677년 숙종 때에 유수 허질이 만호로 올리고 진의 이름을 덕진이라 했다. 덕진돈, 남장포대 등이 모두 덕진진에 소속되어 있었다. 병인양요 때(1866)는 양헌수 장군의 부대가 밤을 틈타 이 진을 통하여 정족산성에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했다.
덕진진의 성문인 공조루(拱潮樓)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만 남아 있었다. 1976년 성곽과 돈대를 고치고 덕진진의 문루를 다시 세웠으며 남장포대와 당시의 대포를 복원해 설치하였다. 문루의 현판은 “바다를 제어한다”는 뜻의 ‘공조루控潮樓’라고 쓰여있다.
옛적 덕진진은 배치 인원은 만호 1명 군관26명 사병 100명 돈군 12명 군량미 115석, 콩 26석, 첨향미 103석, 간장 5독, 진선 2척, 군기와 군용품 약간이었다. 원래 덕포진이 강화에 있었는데 1666년(현종 7)에 통진(지금 김포시 대곶면)으로 옮겼고 그 자리에 덕진진이 설치됐다. 덕진진은 손돌목돈대와 덕진돈대를 관할했다.
* 남장포대
강화의 포대는 문헌기록에 의하면 황산포대(대황산도, 6문), 진남포대(초지진 남쪽, 12문), 남장포대(광성보와 덕진진 사이, 10문), 오두정포대(남장포대 북쪽, 6문), 사망금포대(오두정북쪽, 6문), 용진포대(용진진 남쪽, 8문), 갑곶포대(8문), 인화성포대(6문) 등 8포대이다.
1871년(고종 8년)에 설치한 남장포대와 덕진포대가 덕진진에 소속되었다. 이 덕진진의 건물과 돈대, 포대는 모두 1871년 신미양요 때 파괴되어 허물어졌는데, 1976년에 수리하여 복원된 것이다. 당시에는 포좌 15문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7문이 전시되어 있다. 자연적인 지형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해상에서는 적에게 노출되지 않는 반월형의 천연요새를 이루고 있다.
[강화해설사 팁] “강화에도 석호(潟湖)가 있다." 남장포대 끝에는 밀물, 썰물 때 바닷물이 드나드는 길이 있다. 밀물 때 들어온 바닷물이 모래 턱에 막혀 썰물에 나가지 못하여 연못에 남게 되는데 이런 연못이나 호수를 석호라 한다. 밀물 때를 맞추어 관찰해 보면 바닷물이 연못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칠게, 방게 등이 먹이활동을 하는 것도 볼 수 있다.
석호란 사주(沙柱 모래턱)와 같은 작은 장애물에 의해 바다로부터 분리되어 형성된 연못이나 호수를 말 한다. 하천의 유입으로 점차 염분이 적어지고, 주변의 식물에 의하여 소택지(沼澤地)화 되어 차츰 육지화 되는 경우가 많다. 강릉 해안 경포, 청초호, 화진포 등은 모두 이에 속한다. 석호는 수심이 얕고 바다와는 모래로 격리된 데 불과하므로, 지하를 통해서 해수가 섞여드는 일이 많아 담수호에 비해 염분이 높기 때문에 플랑크톤이 풍부하다. (참고 : 지구과학 사전)
박정자 2018.08.14
덕진진의 성문인 공조루(拱潮樓)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만 남아 있었다. 1976년 성곽과 돈대를 고치고 덕진진의 문루를 다시 세웠으며 남장포대와 당시의 대포를 복원해 설치하였다. 문루의 현판은 “바다를 제어한다”는 뜻의 ‘공조루控潮樓’라고 쓰여있다.
옛적 덕진진은 배치 인원은 만호 1명 군관26명 사병 100명 돈군 12명 군량미 115석, 콩 26석, 첨향미 103석, 간장 5독, 진선 2척, 군기와 군용품 약간이었다. 원래 덕포진이 강화에 있었는데 1666년(현종 7)에 통진(지금 김포시 대곶면)으로 옮겼고 그 자리에 덕진진이 설치됐다. 덕진진은 손돌목돈대와 덕진돈대를 관할했다.
* 남장포대
강화의 포대는 문헌기록에 의하면 황산포대(대황산도, 6문), 진남포대(초지진 남쪽, 12문), 남장포대(광성보와 덕진진 사이, 10문), 오두정포대(남장포대 북쪽, 6문), 사망금포대(오두정북쪽, 6문), 용진포대(용진진 남쪽, 8문), 갑곶포대(8문), 인화성포대(6문) 등 8포대이다.
1871년(고종 8년)에 설치한 남장포대와 덕진포대가 덕진진에 소속되었다. 이 덕진진의 건물과 돈대, 포대는 모두 1871년 신미양요 때 파괴되어 허물어졌는데, 1976년에 수리하여 복원된 것이다. 당시에는 포좌 15문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7문이 전시되어 있다. 자연적인 지형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해상에서는 적에게 노출되지 않는 반월형의 천연요새를 이루고 있다.
[강화해설사 팁] “강화에도 석호(潟湖)가 있다." 남장포대 끝에는 밀물, 썰물 때 바닷물이 드나드는 길이 있다. 밀물 때 들어온 바닷물이 모래 턱에 막혀 썰물에 나가지 못하여 연못에 남게 되는데 이런 연못이나 호수를 석호라 한다. 밀물 때를 맞추어 관찰해 보면 바닷물이 연못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칠게, 방게 등이 먹이활동을 하는 것도 볼 수 있다.
석호란 사주(沙柱 모래턱)와 같은 작은 장애물에 의해 바다로부터 분리되어 형성된 연못이나 호수를 말 한다. 하천의 유입으로 점차 염분이 적어지고, 주변의 식물에 의하여 소택지(沼澤地)화 되어 차츰 육지화 되는 경우가 많다. 강릉 해안 경포, 청초호, 화진포 등은 모두 이에 속한다. 석호는 수심이 얕고 바다와는 모래로 격리된 데 불과하므로, 지하를 통해서 해수가 섞여드는 일이 많아 담수호에 비해 염분이 높기 때문에 플랑크톤이 풍부하다. (참고 : 지구과학 사전)
박정자 2018.08.14
5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
그리운 금강산 노래의 탄생은 1962년 6.25 전쟁 12주년 기념식에 연주하려고 당시 문교부가 일년전 1961년 KBS 방송국에 의뢰하여 세상에 나왔다. 당시 작곡가로 활발하게 활동중인 최영섭 선생님께 의뢰를 했는데 최영섭 선생님은 고향 선배인 한상억 시인께 노랫말을 부탁하여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한상억 시인의 노랫말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던지 최영섭 선생님은 하룻밤에 작곡을 마쳤다고 전한다. “그리운 금강산”은 칸타타 ‘아름다운 내 강산’의 삽입곡 즉 교향적인 합창 모음곡 중 하나였다 한다.
한상억 선생님과 최영섭 선생님은 강화의 자랑이다.작사자 시인 한상억 선생님은 1915년 강화군 양도면 도장리 출생. 인천고등학교 전신 인천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우리나라 강산을 예찬하는 시를 주로 써왔다.인천시 문학상 등을 받았고 “시집 평행선의 대결“을 출간하는 등 많은 문학활동을 하였다. 선생님은 1992년 아들이 사는 미국에서 돌아가셨다. 작곡가 최영섭 선생님은 1929년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출생, 인천중학교에서 공부하다 경복중학교에 편입하여 6학년 때 작곡발표회를 가졌다. 서울대 음대 작곡과에서 공부했고 오스트리아 빈 음대로 유학해 지휘와 작곡을 공부하였다. 최영섭 선생님은 90이 넘은 나이지만 아직 건강하시단다.
강화에는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가 두 곳에 있다. 금강산이 멀리 보이는 곳 강화평화전망대에 먼저 세워졌다. 망향의 그리움과 통일의 염원을 담아 비상하는 날개 짓 형태로 제작됐다. 노래비 앞에 서면 조수미, 박인수 등 국․내외 유명 성악가의 목소리가 담긴 그리운 금강산 노래를 들을 수 있다. 또 한곳은 최근에 세운비인데 외포리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오다보면 양도면 건평공원에 세워져있다.
1. 외포리 해안순환도로 진행중 만나는 "건평리 쉼터"에 세워진 금강산 노래비2. 금강산을 바라보며 "강화 평화전망대"에 세워진 금강산 노래비
박정자 2018.08.14
한상억 선생님과 최영섭 선생님은 강화의 자랑이다.작사자 시인 한상억 선생님은 1915년 강화군 양도면 도장리 출생. 인천고등학교 전신 인천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우리나라 강산을 예찬하는 시를 주로 써왔다.인천시 문학상 등을 받았고 “시집 평행선의 대결“을 출간하는 등 많은 문학활동을 하였다. 선생님은 1992년 아들이 사는 미국에서 돌아가셨다. 작곡가 최영섭 선생님은 1929년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출생, 인천중학교에서 공부하다 경복중학교에 편입하여 6학년 때 작곡발표회를 가졌다. 서울대 음대 작곡과에서 공부했고 오스트리아 빈 음대로 유학해 지휘와 작곡을 공부하였다. 최영섭 선생님은 90이 넘은 나이지만 아직 건강하시단다.
강화에는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가 두 곳에 있다. 금강산이 멀리 보이는 곳 강화평화전망대에 먼저 세워졌다. 망향의 그리움과 통일의 염원을 담아 비상하는 날개 짓 형태로 제작됐다. 노래비 앞에 서면 조수미, 박인수 등 국․내외 유명 성악가의 목소리가 담긴 그리운 금강산 노래를 들을 수 있다. 또 한곳은 최근에 세운비인데 외포리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오다보면 양도면 건평공원에 세워져있다.
1. 외포리 해안순환도로 진행중 만나는 "건평리 쉼터"에 세워진 금강산 노래비2. 금강산을 바라보며 "강화 평화전망대"에 세워진 금강산 노래비
박정자 2018.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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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외성 (사적 제458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적북돈으로 부터 선원면, 불은면, 길상면 초지진까지 강화도 동해안 일대에 쌓은 성곽이며, 지정 면적은 25만5,544.9㎡이다. 고려가 강화로 천도한 1237년고려(고종 24)에 강화 외성의 축조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외성은 1259년(고종 46)에 몽골의 요구의 의해서 모두 헐리게 되었다. 처음 외성은 토성으로 쌓았고 성곽에는 6개의 문루 조해루(朝海樓 연미정)· 복파루,·진해루 (월곶진2곳) ·참경루(용진진)· 공조루(광성보)· 안해루(덕진진)와 암문 6개, 수문 17개를 설치했다.
조선후기에 정묘·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외성의 전략적 의미가 다시 부상되었다. 강화는 집권자들에 의해서 유사시 천도를 가상한 보장처로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에 내륙으로부터 강화를 침략하는 외적의 방어를 위한 관방시설이 필요하였다. 1차 관방시설이 김포의 문수산성이었고, 2차 관방시설이 바로 염하를 사이에 두고 있는 강화외성이었다. 1691년(숙종 17)에는 외성 축조가 시작되었는데, 옥포나루(제승돈 근처)에서부터 초지나루에 이르렀던 당시 외성의 길이는 43리 200보였다. 그 후 외성은 1718년(숙종 44)에 월곶돈에서 부터 휴암돈까지 연장·증축되었다. 화도수문개축기사비(花島水門改築記事碑)
순조3년(1803)에 세워진 비석으로 화도수문의 개축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조복양(1609~1671)이 석문을 설치하여 조수를 막았고, 영조 대에 외성을 축조하면서 다시 수문을 쌓았다는 기사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강화도 간척사업과 강화외성의 축조과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비석 설명문 내용)
사진설명 : 화도수문 개축기사 비 강화대교를 건너 좌회전하여 해안순환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용진진을 지나고 언덕을 넘어 화도(花島) 돈대 앞 과속단속 카메라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다리를 건너 주차장에 차를 멈추어 서면 수문과 비석이 보인다. 박정자 2018.08.14
조선후기에 정묘·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외성의 전략적 의미가 다시 부상되었다. 강화는 집권자들에 의해서 유사시 천도를 가상한 보장처로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에 내륙으로부터 강화를 침략하는 외적의 방어를 위한 관방시설이 필요하였다. 1차 관방시설이 김포의 문수산성이었고, 2차 관방시설이 바로 염하를 사이에 두고 있는 강화외성이었다. 1691년(숙종 17)에는 외성 축조가 시작되었는데, 옥포나루(제승돈 근처)에서부터 초지나루에 이르렀던 당시 외성의 길이는 43리 200보였다. 그 후 외성은 1718년(숙종 44)에 월곶돈에서 부터 휴암돈까지 연장·증축되었다. 화도수문개축기사비(花島水門改築記事碑)
순조3년(1803)에 세워진 비석으로 화도수문의 개축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조복양(1609~1671)이 석문을 설치하여 조수를 막았고, 영조 대에 외성을 축조하면서 다시 수문을 쌓았다는 기사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강화도 간척사업과 강화외성의 축조과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비석 설명문 내용)
사진설명 : 화도수문 개축기사 비 강화대교를 건너 좌회전하여 해안순환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용진진을 지나고 언덕을 넘어 화도(花島) 돈대 앞 과속단속 카메라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다리를 건너 주차장에 차를 멈추어 서면 수문과 비석이 보인다. 박정자 2018.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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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강화 부근리 고인돌"
고인돌은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 고대사회의 대표적인 묘제의 하나로서 한반도 서쪽 지역에 분포되고 있다. 청동기시대 고인돌은 지석묘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고임돌로 큰 덮개돌을 받쳤다하여 붙인 이름이다. 영어로 Dolmen, 한자로 석붕(石棚)이라 한다. 전국 각지에는 2만9천여기 이상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으며 강화에는 160여기가 있는데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제일 많은 고인돌을 가진 나라다.
고인돌은 정치적 단계로 발전한 집단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따라서 강화의 고인돌 분포는 인근 지역보다 우세한 세력이 존재하였던 것을 짐작하게 한다. 지금까지 강화에서 확인된 고인돌은 양사면 교산리 고인돌군, 하점면 부근리 고인돌군, 하점면 삼거리 고인돌군, 내가면 고천리 고인돌군, 내가면 오상리 고인돌군 등의 지역군으로 나뉘어 밀집 분포되어 있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고인돌은 구성 형태에 따라 분류하는데 북방식(탁자식) 고인돌은 무덤방이 지면 위에 있는 굄돌로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며 남방식 고인돌은 무덤방을 지면보다 낮은 지하에 두고 그곳에 고임돌을 세워 무덤방을 만들고, 지면과 거의 비슷하거나 약간 높게 덮개돌을 놓은 형식이다. 또 이처럼 지하에 무덤방을 만들되 고임돌인 지석이 없이 덮개돌인 개석만을 올려놓은 형식을 개석식 또는 무지석식 고인돌이라고 한다. 남한지역에 주로 분포되어 있는 약 2만기 이상의 고인돌은 한강, 금강, 영산강, 섬진강, 낙동강 유역 특히 전라도 지방에 집중 분포되고 있다.
2. 세계 문화유산 “강화 부근리 고인돌” (사적 제137호)
“강화 부근리 고인돌”은 우리나라 대표 고인돌로 북방식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덮개돌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무게는 약 108톤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석재를 옮겨 축조하기 위해서는 최소 1,082명의 인력이 동원되어야 가능한 만큼 선사 시대에 강화도를 매우 막강한 힘으로 지배했던 부족장의 무덤이라 추정할 수 있다. 주변의 고인돌군과 함께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강화 부근리 고인돌”은 강화전쟁사박물관이 앞에 자리 잡고 있어 한반도와 운명을 함께해온 강화의 역사와 유물을 함께 볼 수 있다.
“강화 부근리 고인돌”의 무거운 덮개돌은 실험에 의해 추측한 다면 1,080여명의 청장년이 동원되었다는데 전체 주민은 1,000호 이상 거주하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이 같은 족장의 지배를 받았다면 국가로 발전하는 정치세력이 등장한 시대라 짐작하게 한다. 그렇다면 수천 명의 주민들이 어떻게 식량을 구했을까? 청동기 시대 고인돌 주변
자연환경은 어떠했을까?
힌트: 강화에 있는 넓은 논과 평야는 간척사업 이전 바다였고 갯벌이었다.☜ 참고서적 : “5천년 강화”
글쓴이 : 마리실버힐 원장 (강화문화해설사 )
박정자 2018.08.14
고인돌은 정치적 단계로 발전한 집단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따라서 강화의 고인돌 분포는 인근 지역보다 우세한 세력이 존재하였던 것을 짐작하게 한다. 지금까지 강화에서 확인된 고인돌은 양사면 교산리 고인돌군, 하점면 부근리 고인돌군, 하점면 삼거리 고인돌군, 내가면 고천리 고인돌군, 내가면 오상리 고인돌군 등의 지역군으로 나뉘어 밀집 분포되어 있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고인돌은 구성 형태에 따라 분류하는데 북방식(탁자식) 고인돌은 무덤방이 지면 위에 있는 굄돌로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며 남방식 고인돌은 무덤방을 지면보다 낮은 지하에 두고 그곳에 고임돌을 세워 무덤방을 만들고, 지면과 거의 비슷하거나 약간 높게 덮개돌을 놓은 형식이다. 또 이처럼 지하에 무덤방을 만들되 고임돌인 지석이 없이 덮개돌인 개석만을 올려놓은 형식을 개석식 또는 무지석식 고인돌이라고 한다. 남한지역에 주로 분포되어 있는 약 2만기 이상의 고인돌은 한강, 금강, 영산강, 섬진강, 낙동강 유역 특히 전라도 지방에 집중 분포되고 있다.
2. 세계 문화유산 “강화 부근리 고인돌” (사적 제137호)
“강화 부근리 고인돌”은 우리나라 대표 고인돌로 북방식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덮개돌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무게는 약 108톤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석재를 옮겨 축조하기 위해서는 최소 1,082명의 인력이 동원되어야 가능한 만큼 선사 시대에 강화도를 매우 막강한 힘으로 지배했던 부족장의 무덤이라 추정할 수 있다. 주변의 고인돌군과 함께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강화 부근리 고인돌”은 강화전쟁사박물관이 앞에 자리 잡고 있어 한반도와 운명을 함께해온 강화의 역사와 유물을 함께 볼 수 있다.
“강화 부근리 고인돌”의 무거운 덮개돌은 실험에 의해 추측한 다면 1,080여명의 청장년이 동원되었다는데 전체 주민은 1,000호 이상 거주하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이 같은 족장의 지배를 받았다면 국가로 발전하는 정치세력이 등장한 시대라 짐작하게 한다. 그렇다면 수천 명의 주민들이 어떻게 식량을 구했을까? 청동기 시대 고인돌 주변
자연환경은 어떠했을까?
힌트: 강화에 있는 넓은 논과 평야는 간척사업 이전 바다였고 갯벌이었다.☜ 참고서적 : “5천년 강화”
글쓴이 : 마리실버힐 원장 (강화문화해설사 )
박정자 2018.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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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의 간척사업과 지형변화
강화는 고려의 왕도였던 개성과는 불과 약 30km, 조선의 왕도였던 서울과는 약 60km 떨어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강화수역은 개성과 서울로 진입하는 해로들이 모여드는 곳으로서 나라의 인후지지(咽喉之地)로 불렸다. 그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국난이 있을 때마다 조정과 수도의 주민들을 수용하고 적의 침략을 막아냄으로써 강화를 전략 요새지화 하였다. 갯벌로 둘러싸인 강화는 천연 요새이며 간척을 통해 식량을 지역 내에서 조달할 수 있는 병참기지까지 갖춘 요충지이다.
우리나라는 자연조건과 사회·경제적 조건이 간척활동에 적합하다. 강화는 우리나라에서 간척사업이 가장 일찍이 체계적으로, 그리고 대규모로 시행된 지역이므로 강화의 간척사는 곧 우리나라 지역개발의 역사, 그리고 인위적 환경개조의 역사를 파악하는 길잡이가 될 수 있다. 간척은 평화적으로 영토를 확장할 수 있는 가장 으뜸가는 방법이다. 간척에 의하여 포와 만이 평야가 되고, 작은 섬들이 평야 중의 고립된 산으로 변한 독특한 경관은 강화지역 내 도처에서 확인된다. 현재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평야 내에 남아있는 간척 전 지명은 마니산 아래 동네 덕포리, 길상 선두포, 갑곶, 월곶, 장곶, 더리미등 포구였거나 바다를 향해 돌출한 작은 반도를 의미한다.
강화는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자신들의 고장을 낙토로 개조한 개척정신을 토대로 이른바 간척지 문화를 이루었고, 문화전통은 외침을 물리친 용맹성과 더불어 강화지역 주민성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강화지역의 경제력은 800여 년에 걸친 간척에 따른 지역주민의 경지개발의 결실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이와 같은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은 하나의 체계 속에서 상호작용하여 강화의 지역성 형성의 토대가 되었다.
마니산이 속해있는 화도면 일대는 “고가도”라는 섬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며, 그 사이에는 갯벌과 수로, 선두포· 덕포 등의 포구가 있었다. 조선 1706년 숙종 때 길상면 선두리와 화도면 가능포 사이의 바닷길을 막아 강화에서 제일 넓은 농경지를 만들었다. 강화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농경지는 개간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간척이전에는 갯벌이고 바다였다. 현재 교동도는 화개산· 율두산· 수정산을 근간으로 하는 3∼4개의 작은 섬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간척에 의해 현재의 교동면이 되었고, 삼산대교를 넘어 넓게 펼쳐지는 농경지는 송가도· 석모도· 어유정도로 분리되어 있던 섬들을 간척에 의해 하나로 만들어 삼산면이 되었다.
☞ 강화군 郡史編纂委員會 新編 江華史 참고 박정자 2018.07.24
우리나라는 자연조건과 사회·경제적 조건이 간척활동에 적합하다. 강화는 우리나라에서 간척사업이 가장 일찍이 체계적으로, 그리고 대규모로 시행된 지역이므로 강화의 간척사는 곧 우리나라 지역개발의 역사, 그리고 인위적 환경개조의 역사를 파악하는 길잡이가 될 수 있다. 간척은 평화적으로 영토를 확장할 수 있는 가장 으뜸가는 방법이다. 간척에 의하여 포와 만이 평야가 되고, 작은 섬들이 평야 중의 고립된 산으로 변한 독특한 경관은 강화지역 내 도처에서 확인된다. 현재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평야 내에 남아있는 간척 전 지명은 마니산 아래 동네 덕포리, 길상 선두포, 갑곶, 월곶, 장곶, 더리미등 포구였거나 바다를 향해 돌출한 작은 반도를 의미한다.
강화는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자신들의 고장을 낙토로 개조한 개척정신을 토대로 이른바 간척지 문화를 이루었고, 문화전통은 외침을 물리친 용맹성과 더불어 강화지역 주민성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강화지역의 경제력은 800여 년에 걸친 간척에 따른 지역주민의 경지개발의 결실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이와 같은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은 하나의 체계 속에서 상호작용하여 강화의 지역성 형성의 토대가 되었다.
마니산이 속해있는 화도면 일대는 “고가도”라는 섬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며, 그 사이에는 갯벌과 수로, 선두포· 덕포 등의 포구가 있었다. 조선 1706년 숙종 때 길상면 선두리와 화도면 가능포 사이의 바닷길을 막아 강화에서 제일 넓은 농경지를 만들었다. 강화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농경지는 개간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간척이전에는 갯벌이고 바다였다. 현재 교동도는 화개산· 율두산· 수정산을 근간으로 하는 3∼4개의 작은 섬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간척에 의해 현재의 교동면이 되었고, 삼산대교를 넘어 넓게 펼쳐지는 농경지는 송가도· 석모도· 어유정도로 분리되어 있던 섬들을 간척에 의해 하나로 만들어 삼산면이 되었다.
☞ 강화군 郡史編纂委員會 新編 江華史 참고 박정자 2018.07.24
1
강화도 역사기행을 시작하며
강화도 역사기행” 문을 열며
인천시 문화해설사 1호로서 강화도 역사를 해설하던 10여년전 시절 그저 끼리끼리 모여 공부하고 배운대로 안내하고 설명해 왔었다. 대학 교수님도 안내하였고 문인들과도 함께 토론하면서 강화도가 소리질러 알리고 싶어하는 오랫동안 간직했던 기쁨과 아픔을 애써 안내하려 노력했었다.
그러나 이제 나이가 들어 다시 강화도를 안내하는 기회를 얻게 되니 기쁨과 함께 걱정이 앞선다. 역사학을 전공해서 강화 역사를 정확하게 아는 것도 아니고 역사를 분석할 만큼의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강화도 주민으로 살아온지 5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 고장 강화를 올바로 알리고 강화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또다시 해설에 나선다.
이제는 보이는 강화는 물론 보이지 않는 강화를 소개해야 한다. 강화를 사랑하는 여러분과 함께 답사도 하고 연구토론도 하면서 우리 고향 강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소개할 수 있기를 바란다. 박정자 2018.07.17
인천시 문화해설사 1호로서 강화도 역사를 해설하던 10여년전 시절 그저 끼리끼리 모여 공부하고 배운대로 안내하고 설명해 왔었다. 대학 교수님도 안내하였고 문인들과도 함께 토론하면서 강화도가 소리질러 알리고 싶어하는 오랫동안 간직했던 기쁨과 아픔을 애써 안내하려 노력했었다.
그러나 이제 나이가 들어 다시 강화도를 안내하는 기회를 얻게 되니 기쁨과 함께 걱정이 앞선다. 역사학을 전공해서 강화 역사를 정확하게 아는 것도 아니고 역사를 분석할 만큼의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강화도 주민으로 살아온지 5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 고장 강화를 올바로 알리고 강화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또다시 해설에 나선다.
이제는 보이는 강화는 물론 보이지 않는 강화를 소개해야 한다. 강화를 사랑하는 여러분과 함께 답사도 하고 연구토론도 하면서 우리 고향 강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소개할 수 있기를 바란다. 박정자 2018.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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