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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980年 5月 18日 光州이세상에서 가장소중한 이곳에 함께있는이기에..

작성자
한재혁
작성일
2016.11.22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180
내용




"왜그냐면 인제 내가 全南大 宣言文을 썼는데 거기에 어떤 대목이 나오냐면은 그때만 해도 인제 可能하면 들어가서 빨갱으로 안 몰리기 위해서 일부로 北을 좀 까는 內容들이 한줄씩 들어가고 그랬다고, 518直前에도 뭐 이 全南大 示威때도, 北傀는 誤判말라 이런 피켓도 들고 그랬는데, 근데 그게 虎視眈眈 노리고 있는 北傀의 어쩌고 저쩌고 이런 대목들이 들어간다고."
(윤한봉2006, 尹한봉 口述錄取文 1次 2-7 http://trollwall.egloos.com/4236007).

이 證言 1-2에서 尹한봉은 自己를 비롯한 光州운동권은 統革당의 靑少年 粗織 광랑 出身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1960年 後半에 統革당의 共産主義 革命 戰略은 武裝蜂起였으며, 靑少年 時節 그 이데올로기 影響을 光州운동권이 光州사태라고 불리는 무장봉기를 일으킬 準備를 하였다.

尹한봉이 지어낸 僞裝口號 ‘金日成은 誤判 말라’가 실제로 光州사태 때 使用되었다. 그리고 그 當時 윤한봉의 同志 尹상원의 英語 通譯이었던 인요한이 그 口號에 낚였다. 그도 그럴 것이 宣敎師 子女로서 어렸을 때 光州의 친구들과 함께 자랐던 인요한은 光州사태 때 아직 大學 進學을 못한 靑少年이었으며 그래서 分別力이 모자라 쉽게 낚였다.
지난 5月 16日에 인요한이 채널A 朴종진의 快刀亂麻에 出演해 "아침에 反共口號를 외치고 始作했다”고 말했다.
무엇이 眞實이었는가? 道廳 接受 後 尹상원은 미국인들을 人質로 拉致하려 했다. 그런데 그의 同志들이 그의 反美 발톱을 그렇게 너무 서둘러 드러내면 光州市民들의 協助를 얻기 어렵다고 말리며 說得하여 反美 口號를 갑자기 反共 口號로 바꾼 것이었다. 反共 口號는 僞裝口號요, 本來 目的은 反美였기에 只今도 各種 5.18 行事에서 反美 口號들이 외쳐진다. 유네스코에 5.18 記錄物들이 世界記錄遺産으로 登載되었으니 한번 읽어보라. 그 어디에도 反共 理念의 痕跡은 없고 오로지 反美 理念으로 가득 찬 聲明書들뿐이다.



인요한은 아직 靑少年이어서 分別力이 不足했기에 낚였던 것이겠지만 當時 尹한봉 同年輩였던 조갑제 記者도 그 僞裝口號에 낚이셨는가? 위장 구호가 反共 口號라는 論理라면 그 위장 구호를 만들어 낸 尹한봉은 反共 鬪士라는論理가 된다. 靑少年 時節 統革당 理念의 影響을 받아 光州운동권이 된 자가 反共 鬪士였는가? 미국 亡命時 北韓 當局과 共同으로 平壤祝典을 推進하던 尹한봉이 不法으로 林수경 양을 訪北시켰던 것이 反共 行爲였는가? 오늘의 임수경은 尹한봉이 文규현 神父를 시켜 그女의 訪北을 도와 平壤祝典에 參席시켰기 때문에 可能하였다. 그러나 그 누가 그女를 가리켜 反共鬪士라고 말하는가? 尹한봉 本人도 自身의 立場은 反共이 아님을 分明히 밝혔다. 오히려 그는 反共 理念과 鬪爭하던 자였다.
그렇다면 尹한봉이 反共理念과 鬪爭할 目的으로 戰略上 지어낸 僞裝口號가 眞實된 反共口號일 수 있었겠는가? 만약 光州사태는 反共 民主화운동이었다는 조갑제 기자의 주장의 근거가 단지 윤한봉이 종종 쓰던 위장수법의 하나로써 지어낸 구호뿐이라면 실제로는 광주사태가 반공 민주화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는 셈이다.
이세상에서 가장소중한 이곳에 함께있는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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