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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역사

제목

강화의 간척사업과 지형변화

작성자
박정자
작성일
2018.07.24
첨부파일0
추천수
1
조회수
220
내용

    강화는 고려의 왕도였던 개성과는 불과 약 30km, 조선의 왕도였던 서울과는 약 60km 떨어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강화수역은 개성과 서울로 진입하는 해로들이 모여드는 곳으로서 나라의 인후지지(咽喉之地)로 불렸다. 그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국난이 있을 때마다 조정과 수도의 주민들을 수용하고 적의 침략을 막아냄으로써 강화를 전략 요새지화 하였다. 갯벌로 둘러싸인 강화는 천연 요새이며 간척을 통해 식량을 지역 내에서 조달할 수 있는 병참기지까지 갖춘 요충지이다.


    우리나라는 자연조건과 사회·경제적 조건이 간척활동에 적합하다. 강화는 우리나라에서 간척사업이 가장 일찍이 체계적으로, 그리고 대규모로 시행된 지역이므로 강화의 간척사는 곧 우리나라 지역개발의 역사, 그리고 인위적 환경개조의 역사를 파악하는 길잡이가 될 수 있다. 간척은 평화적으로 영토를 확장할 수 있는 가장 으뜸가는 방법이다.

간척에 의하여 포와 만이 평야가 되고, 작은 섬들이 평야 중의 고립된 산으로 변한 독특한 경관은 강화지역 내 도처에서 확인된다. 현재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평야 내에 남아있는 간척 전 지명은 마니산 아래 동네 덕포리, 길상 선두포, 갑곶, 월곶, 장곶, 더리미등 포구였거나 바다를 향해 돌출한 작은 반도를 의미한다.


    강화는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자신들의 고장을 낙토로 개조한 개척정신을 토대로 이른바 간척지 문화를 이루었고, 문화전통은 외침을 물리친 용맹성과 더불어 강화지역 주민성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강화지역의 경제력은 800여 년에 걸친 간척에 따른 지역주민의 경지개발의 결실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이와 같은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은 하나의 체계 속에서 상호작용하여 강화의 지역성 형성의 토대가 되었다.


    마니산이 속해있는 화도면 일대는 “고가도”라는 섬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며, 그 사이에는 갯벌과 수로, 선두포· 덕포 등의 포구가 있었다. 조선 1706년 숙종 때 길상면 선두리와 화도면 가능포 사이의 바닷길을 막아 강화에서 제일 넓은 농경지를 만들었다. 강화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농경지는 개간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간척이전에는 갯벌이고 바다였다.

현재 교동도는 화개산· 율두산· 수정산을 근간으로 하는 3∼4개의 작은 섬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간척에 의해 현재의 교동면이 되었고, 삼산대교를 넘어 넓게 펼쳐지는 농경지는 송가도· 석모도· 어유정도로 분리되어 있던 섬들을 간척에 의해 하나로 만들어 삼산면이 되었다.


☞ 강화군 郡史編纂委員會 新編 江華史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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